시나리오

한식(寒食)여행

등장인물

노인
남자
노인의 누이

참고사진 및 정보: http://www.digerati.co.kr/?p=3988

한식(寒食) :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는 4월 5일 무렵이다.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이다. 집안에 따라서는 사당에서 조상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성묘를 하고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이때 서울 지역에서는 제사에 앞서 먼저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 성묘의 대상은 기제사를 받는 조상도 있지만,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 먼 조상이나 후손이 없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또 손 없는 날 또는 귀신이 꼼짝 않는 날로 여겨 산소에 손을 대도 탈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소에 개사초(改莎草: 잔디를 새로 입힘)를 하거나 비석 또는 상석을 세우거나 이장을 한다.
이렇듯 성묘와 산소 돌보기의 풍속이 유지되는 데에는 한식이 식목일과 겹치며, 식목일이 공휴일인 점이 크게 이바지했다.

# 구성역

4월 6일 일요일 아침 8시반
올해도 어김없이 분당선 구성역 1번출구로 곧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새벽을 깨우며
올라온다. 나이가 무색하게 노인의 발걸음은 힘차고 활기가 있다.
누군가 만나기로 한듯 주변을 두리번 살피며 전화기의 시계를 들여다 본다.
잠시후 검은색 승용차가 1번출구 옆 주차장으로 서둘러 들어선다. 승용차가 멈추고 나들이 차림의 40대 초반의 남자가 내린다.

(남자는 노인을 바라보며 인사한다.)
아버지. 언제 도착하셨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노인은 별일아니라는 듯 서둘러 차에 몸을 싣는다.)
왔구나. 그래, 좀전에 도착했지. 출발하자.

노인은 안전벨트를 채우고 남자는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검색한다.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 추천경로1, 267km 3시간7분 예상요금 10500원. 목적지를 설정하고 남자는 시동을 켠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그럼. 재승이, 시현이는 많이 컸지.

네, 재승이는 지난달부터 유치원에 다녀요. 재밌어 하며 잘 다니고 있어요.
시현이는 요즘 부쩍 커서. 아주 방방 거리며 잘 놀구요.

재승이가 유치원에 잘다닌다니 좋구나. 시현이는 더 이뻐졌겠네.

# 출발 (귀향)

올해는 한식이 마침 일요일이라 고속도로에 차들이 예년보다 많이 늘었다.
저마다 긴겨울내 조상님들의 산소가 무탈한지 살피러 가는 효녀효자들을 태운 차들이 분주하다.

차는 용인ic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톨게이트까지 고속도로를 달린다.

아침식사는 하셨어요?

그럼. 먹었지. 넌 먹었니

전 별 생각이 없어서요. 이따 점심겸 해서 먹으려구요.
중앙고속도로 타고가다 제천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갈께요.

그래. 천천히 부지런히 가자고. 피곤하면 휴게소에 들려서 좀 쉬다 가고.

껌 있는데. 씹으실래요?

아니. 난 괜찮다.

남자는 한손으로 껌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는 음악을 켠다. 자동차 스피커에선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긴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 햇살이 고속도로를 비추며 이들의 여행을 반기는 듯 하다.

아버지 저 이번에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경영대학원에요.

그래. 잘 했네. (노인은 흐믓한듯 옅은 미소를 짓는다.)

예전부터 가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어떻게 기회가 되서 입학했습니다.

그래. 열심히해라. 공부는 평생하는 거야. 부지런히 해봐.

네.

# 휴게소1

남자와 노인을 태운 차는 고속도로를 2시간여 달려 중앙고속도로 제천휴게소에 도착한다.

아버지 이번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죠.

그러자. 많이 왔네.

우동드실래요?

아니 난 커피나 한잔 마시자.

(휴게소 주차장에 차가 멈추고) 노인은 차에서 내려 화장실로 향한다.

아버지 그럼 화장실 다녀오세요. 커피 타놓을께요.

남자는 휴게소로 들어가 커피한잔과 우동하나를 주문한다.

# 휴게소2

한가한 중앙고속도로 처럼 이곳 휴게소도 여전히 한가한 모습이다.
노인은 커피를 마시고 남자는 우동을 먹는다.

11시 10분이니까. 올해도 여기까지 2시간정도 걸렸네요.

그러네. 슬슬가자고. 급히 서둘것 없이

고모님에게는 연락하셨죠.

그럼. 몇일전에 전화했지.

네. 작년에는 댐공사가 거의 다 되었었으니.
이번에 가면 물이 다 차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게. 물이 다 차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느새 남자는 우동한그릇을 비우고 담배한가치를 피우려 자리를 일어선다)

아버지 저 화장실좀 다녀올께요. 다녀와서 바로 출발하시죠.

그래. 노인은 고개를 휴게소 대형 tv쪽으로 돌린다.

# 국도 (풍경)

휴게소를 출발한 차는 1시간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남안동ic에 도착했다. 요금을 계산하고
이제부터 약 1시간동안 국도를 달려 의성시내까지 가야한다.
창밖으로 안동간고등어 광고판이 보이고 한가로운 논과 밭 그리고 드문드문 집들과 가게들이 스쳐 지나간다.
몇년째 오는 길이지만 이곳 시골길은 크게 변함이 없다. 언제나 한가하고 늘 한결같다.

# 의성시내

출발한지 3시간40분 정도가 다되어 의성시내에 도착했다.
이곳 의성시내는 노인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노인의 고향 공정리는 이곳 의성군 시내에서 다시 차로 50분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지금이야 아스팔트 길이 닦여 있어 다니기가 수월하지만, 10여년전까지도 일부 비포장길이 남아있던 시골중에 시골이다.
이곳 의성시내는 노인에게 어릴적 한달에 한번 장이서는 곳이자, 기차역이 있고 버스역이 있는
번화가 이고. 시골소년에게는 가장 크게만 보이던 신천지와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늘 고향을 방문할때면 이곳 의성시내에서 고향친지에게 선물할 물건을 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곳사람들이 예로 부터 제사나 특별한 날에 올리는 돔배기.
아마도 이곳이 깊은 내륙지방이다 보니. 생선이 귀해서 예로부터 이곳사람들은 특별한날에는 돔배기라는 상어고기를 꼬치로 요리하여
먹었던 듯 싶다.
아무튼 노인은 의성시장 입구에 내려 돔배기를 사러 들어 간다.

아주머니 요 돔배기 얼마에요.

3만원입니다.

좋은걸로 하나 주세요.

네.

(한가한 시골시장통)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주섬주섬 돔배기 한덩어리를 골라 비닐봉지에 담는다.
노인의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지갑에서 돈 3만원을 건네고 비닐봉지를 건네 받는다.

수고하세요.

아버지 술하고 나머지 음식은 다 준비해 왔어요.

그래. 그럼 이것만 사서 얼른 가자.

네.

#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

의성시내를 떠난 차는 오붓한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다. 창밖으로 산수유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띤다.
드문드문 선산에 찾아온 객지사람들과 차들이 보인다.
그래도 사람구경하기가 쉽지않은 시골중에 시골이다. 한가로운 사과밭과 마늘밭들이 반가웁게 노인과 남자를 반기는 듯 하다.
사곡면사무소 앞을 지날무렵 이곳의 특산물인 육쪽마늘 대형 모형물이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왔음을 알린다.

저게 다 산수유나무죠?

그럼. 저게 다 산수유나무지. 옛부터 이곳에 산수유가 많이 자랐지.

저건 마늘밭이고, 저건 사과나무고

올해는 댐공사가 얼마나 진행 되었을지 궁금하네요. 부디.. 산소가는 길에 문제는 없어야 할텐데요. 차세울자리는 있을까요..

어 사곡초등학교네요. 이따 올라가는 길에 잠시 들렸다 가죠.

# 공정리 산소앞

한가로운 굽이굽이 시골길을 따라 목적지 공정리 산소앞에 도착했다.
올해는 댐에 물이 제법 찼다. 작년엔 걸어서 갔던 선산을 올해는 차로 댐외곽을 뱅돌아서 선산앞까지
들어갔다. 선산밑 좁은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준비해온 음식과 술을 담은 배낭을 남자는 둘레맨다.
노인은 차에서 내려 등산용 지팡이를 짚으며 선산으로 바삐 움직인다.
뒤를 이어 남자는 노인의 뒤를 따른다.

일년에 한번 올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왜 하필 딱 여기서 부터 댐을 만들께 뭐래요.

눈앞에 펼쳐 지는 큰댐 속으로 노인의 가족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모두 수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노인은 유구무언이라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댐만 바라보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노인은 앞장서 걷는다. 일년만에 조상님들을 만나뵈러 오는길
올해도 이곳 선산을 오를수 있음을 노인은 감사히 여기는 듯 모습은 평온하고 온화하다.

작년에 왔을때는 할아버지 산소근처에서 노루를 봤었잖아요. 올해도 또 볼수 있으면 좋을텐데..

할아버지 산소가 볓이 잘들어서 노루들이 좋아할만한 곳이지.

경사가 제법있는 산길을 노인과 남자는 힘들지 않게 삐져나온 나무가지를 헤치며 익숙하게 오른다.
한참을 올라 맨 꼭대기 산소에 도착한다. 겨울내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잘있어준 산소들을 보니 왠지 반갑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먼저 산신제 부터 지내자.

네.

남자는 익숙한듯 맨위산소옆 빈터에 가져온 음식을 하나둘 종이접시에 올려놓고. 술병을 노인에게 건넨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종이컵을 들어 노인이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앞으로 한번 술을 떨구고 좌로 한번 우로한번 술을 모두 떨군다.
그리고 노인과 남자는 함께 두번 절을 한다.

됐다. 그럼 이제 증조할아버지 산소앞으로 가자

남자는 펼쳐놓았던 음식과 접시를 추스려 바로옆 산소 앞으로 간다.
산소상석의 흙을 손으로 훔쳐내고 접시를 놓고 음식을 하나둘 올려 놓는다.
다시 무릎을 꿇고 종이컵을 들어 노인이 따르는 술을 받아
앞으로 좌로 우로 한번씩 산소에 뿌리고
노인과 함께 두번 절을 한다.

이제 할아버지 산소로 옮기자.

이곳 산소에는 네다섯 묘가 있다. 노인의 아버지, 할아버지, 사촌아주머니, 그리고 누군지 알수없는 묘까지 맨아래 햇볓이 잘드는 곳에 남자의 할아버지의 묘가 있다.
둘은 그곳으로 내려가 정성스레 상석을 정리하고 다시 음식을 올린후 술을 따르고
나란히 절을 한다.

(절을 올리고 서서 잠시 눈을감고 고개를 숙여 인사말을 전한다.)

작년한해도 할아버지가 잘 보살펴 주셔서 우리 아이들, 가족모두가 모두 무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해도 모두 건강하고 탈없이 잘 지낼수 있도록 해주세요.

(산소앞에 서서 주변경치를 둘러보며 이야기 나눈다)

이곳은 참 아늑하고 볓도 잘들어서 좋은거 같아요.

그래. 이곳이 내가 어릴적 나무를 하러 자주 오던 곳인데..
그때도 나무를 하러 올라와 보면 볓이 잘들어서 노루가 낮잠을 자주 자고 있었지.

여기가 터가 좋아서 일부러 할아버지 묘를 이곳에 모신거지. 올라오기가 쉽지않은 곳이지만..

예전엔 잘 몰랐는데. 자주 와보니 할아버지 묘자리가 참 좋은 곳이라는 걸 알것 같아요. 이젠.

그럼 이제 요위 아주머니 산소에 절올리고 또 내려가 보자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길이 어쩌면 더 조심스럽다. 낙엽들로 덮힌 이런 인적드문 산길은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면 쭉 미끄러져 버리기도 쉽다. 하지만 노인은 능숙하게 타박타박 산길을 내려온다.
뒤따르는 남자는 조심스럽게 한걸음 내딛는 걸음이 왠지 더뎌 보인다.
한참을 낙엽밟는 소리를 내며 내려온 노인과 남자는 산소 맨아래 봉긋 솟은 묘쪽으로 향한다.
언제나 그렇듯 할머니 산소에 인사드리기 전에 옆의 먼친적뻘되는분의 산소에 절을 올린다.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어도 찾아돌보기 힘든 경우가 있다. 다행히 이렇게 할머님 산소 옆에 묘가 있어
자식들이 한두번 들를때마다 겸사겸사 남은 술 한잔 올리고 인사를 올리게 되니 이것도 큰 복이라면 복일것이다.

내자손이 아닌 바로 옆 묘의 자손이 매년 찾아와 인사하는 팔자
이렇듯 팔자라는게 이생을 떠나서도 질기게 남아 있는것인가 라는 생각이 남자에게 문득 든다.

그럼 이제 할머니께 인사올리자

음식을 올리고 묘에 술을 드리고 나란히 절을 올린후 노인과 남자는 산소앞에 털썩 앉는다.
할머님의 산소를 끝으로 두남자의 오늘 방문목표는 일단 모두 달성했다.
남자와 노인은 가져온 음식을 풀어 놓고 하나둘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무언가 추억에 잠긴듯 노인은 아무말 없이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하며 둘러본다.

아버지 바나나 하나 드세요.

그래.

남자와 노인은 별다른 대화없이 가만히 바나나를 씹으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주변의 풍경과 은은히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감상한다.
잠시 시간이 흐른후 떠날 채비를 하려는 듯 노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누나집으로 가보자.

네. 전화는 미리 하셨죠?

그럼.

# 청송(고모)집

산소앞에서 출발한 차는 대관령고개처럼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청송으로 달려간다.
한 30분쯤 달리다 길가옆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 초입 아담한 집으로 들어가 선다.
차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여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과 많이 닮았다.

이제 왔나. 빨리 들어와라 밥묵자.

안녕하셨어요. (남자는 차에서 내려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노인도 미소를 띠며 누이가 열어둔 문으로 들어간다)

댐에 물이 많이 찾드나.

이제 댐공사가 다되서 벵둘러서 산소에 가야 하데

넌 애들 많이 컷재. 큰애가 몇살이고

네 많이 컸어요. 큰애는 여섯살 둘째는 네살됐어요.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아이들의 사진을 노인의 누이에게 보여준다.
눈이 침침한 누이는 얼굴을 사진가까이에 가져다 대고 들여다본다.)

니 많이 닮았네. 요아는 엄마 많이 닮았나 보네. 이쁘기도 해라.

누나 배고프다. 밥 먹자.

그래. 니 온다고 미리 준비해뒀다. 어여 묵자.

노인과 누이 그리고 남자는 작은 밥상에 둘러 앉아 정성껏 차린 소박한 음식을 먹는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어디 몸 불편하신데는 없구요.

내카 똑같다. 그냥 그렇게 살재. 뭐 별거 있나.

(노인은 누이가 차린 밥을 맛있게 먹는다. 마치 어릴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손맛을 느껴지는 듯 )

# 청송2

남자는 차트렁크에서 쇼핑백을 하나 꺼내서 노인의 누이에게 건넨다.

고모. 편하게 입으시라고 하나 사왔어요. 사이즈 맞는지 한번 입어 보세요.

또 뭐가. 색깔이 참 곱네. 늙은이가 이런거 입어도 되나.

그럼요. 나이드실수록 이렇게 밝은 색을 입으셔야 더 기운도 나고 좋데요.

그러나. 어디 한번 입어보자.

(노인은 말없이 마냥 흐믓한 미소만 머금으며 누이와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다.)

# 귀경

노인은 속주머니에서 흰봉투 하나를 꺼내 누이의 손에 쥐어 준다.

이게 뭐꼬. 됐다. 니 가져가서 써라

(노인은 그냥 웃으며 늙은 누이와 짧은 만남의 시간을 뒤로 하고 돌아선다.)

고모님. 건강하세요. 내년에 또 올께요.

그래 니도 잘지내라. 애들 잘키우고.

네.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라는 걸 남자는 안다. 매년 이맘때 노인과 함께 이곳에 들를때마다
남자는 고모를 보며 올해도 무탈하셨구나. 하는 마음으로 내년을 기약하는 투박한 서로의 인사
노인의 누이는 담담한듯 어딘가 아쉬운 표정의 얼굴로 노인과 남자를 배웅한다.)

잘가라. 내년에 또 와라.

네. 건강하세요. 내년에 또 올게요.

(노인도 안다. 이것이 늙은 누이와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삶이란 이렇듯 기약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담담히 담담히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귀경2

노인의 누이를 뒤로 하고 출발한 차는 이제다시 먼길을 가야하는 나그네처럼 분주히 달려왔던 도로를 거슬러 달린다.
넘어온 고갯길을 다시 넘고 저멀리 선산을 어느새 뒤로 하고 큰마늘 모형이 있던 사곡면사무소까지 내달렸다.
도로 좌우로 한가한 논밭이 펼쳐지고 저멀리 태양은 조금씩 서쪽으로 뉘었뉘었 넘어가고 있다.
면사무소를 지나 한적하고 조그마한 사곡초등학교 초입에 다다르자 남자는 차의 속도를 줄인다.

아버지 사곡초등학교에 잠시 들렸다 가시죠.

어. 왜

그냥요. 아버지 한번 잠시 구경하시고 가시라구요.

(노인은 대답대신 넌지시 창밖의 학교를 바라본다.)

# 사곡국민학교

차에서 내린 노인과 남자는 썰렁한 학교를 둘러본후 정문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이순신장군 동상을 바라 본다.
잠시 추억에 잠긴듯 노인은 아무말없이 이곳의 바람냄새, 고향냄새를 음미한다.

아버지 학교 다니실때는 학생이 많았나요?

그땐 학교가 여기 밖에 없었지. 그래서 저 멀리사느 마을 아이들도 모두 이곳까지 걸어서 와야 했지.

그땐 버스도 없었을테니. 한참을 걸어서 와야 했겠네요.

그럼 그땐 무조건 걸어 다녀야 했지.

학교다는것도 아무나 다니지 못했어. 아버지가 우리형제중에서 나만 학교를 보내주셨지..
# 고속도로

사곡초등학교를 떠난 차는 거침없이 국도를 빠져나와 서안동ic에서 고속도로에 올라타 서울로 향해 달린다.
어느새 뉘였뉘였 해는 저물어 가고 검붉은 석양이 뻥뚤린 고속도로와 한가로운 시골풍경을 더욱 애잔하게 비춘다.

아버지 이제 맘이 좀 편하세요?

그럼. 올해 숙제도 잘 했네.

(남자는 노인과 7년을 함께 일년에 한번 둘만의 여행을 하는 중이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노인이 안된마음으로 시작한 여행길
이젠 남자가 이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 둘만의 무언의 교감을 10시간 동안 하는 특별한 시간. )

# 휴게소

서울이 가까워 질수록 고속도로가 차로 붐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다.
한참을 달린 차는 어둠을 뚫고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서기 바로전 휴게소로 들어간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시죠.

그래. 좀 쉬었다 가자

휴게소는 귀경하는 차들로 분주하다. 어디 숨었다 이렇게 나왔는지. 휴게소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남자와 노인은 튀김우동을 한그릇씩 앞에 두고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

아버지 우동맛 어떠세요.

맛있네. 난 입맛이 너무 좋아. 그래서 음식조절을 해야지 안그러면 살이 금방 불어.

아버지 호두과자 드실래요.

아니 됐어. 너나 사서 아이들 갔다 줘라.

노인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밥을 먹는 모습이 참 힘이 있다.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자기관리를 잘한 결과일 것 이다.
남자는 식사를 마치고 휴게소 호두과자매장에서 호두과자 두봉지를 사서 들고 온다.

# 서울 암사동

휴게소를 나온 차는 드믄드문 막힌 고속도로를 지나 서울로 향해왔다. 남자의 집은 용인 하지만 노인이 살고 있는 암사동으로
차는 부지런히 달려왔다.

아버지, 아주머니는 요즘 별일 없으시죠..

그럼. 그여자는 똑같지. 밤에 일하고 낮에 자고.. 불면증도 그대로고

네. 아주머니 불면증은 고칠수가 없나요.

그여자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해도. 안되나봐. 사람이 다 자기 팔자가 있는 건지..

# 도착

어느새 저녁 10시가 다되어 차는 노인의 집앞에 도착 했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고모가 싸주신 된장을 트렁크에서 꺼내 차에서 내린다.

아버지 이거 호두과자에요. 아주머니랑 함께 드세요.

그래. .. (뭐 이런걸 샀냐는 듯 노인은 호두과자 봉지를 건네 받는다.)

그럼 저 이만 가볼께요. 아주머니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래. 어두운데. 길 조심해서 잘 들어가라.

수고많았다.

네. 그럼 또 연락드릴께요.

(남자는 노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라탄다.
차는 다시 어둠을 뚫고 남자의 용인집으로 달려나간다.)

노인은 남자의 차가 떠나는걸 지켜 보고서 쓸쓸히 돌아서 집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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