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방법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방법

최근 우연히 미국의 전설적인 벤처투자자 ‘폴 그레이엄‘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벤처캐피탈이자 인큐베이터인 Y Combinator 의 창시자이자 Dropbox, Airbnb 등 성공적인 투자를 이끈 인물)이 2006년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을 보게 되었다.

“How To Do What You Love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방법)” 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하고 띄어졌다. 이미 8년 지난 글이지만 행여 도망가기라도 할까 게걸스럽게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서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겠다며 캠핑카를 빌려 여행도 하고, 사업도 한번 말아먹어가며 2년째 답을 찾고 있는 중이었던 나에게는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사막의 한 복판에서 오아시스가 불과 2km 앞에 있다고 쓰여진 안내판을 찾은 기분이었다.

글이 워낙 지혜와 위트가 뚝뚝 묻어나는 좋은 내용이라 전부 번역하고 싶지만, 엄청난 분량도 분량인데다가 한국 정서나 문화와는 맞지 않는 지극히 미국적인 관점의 내용들도 있어서, 두 파트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번역/의역해 보았다. 아래는 그 첫번째 파트, 나머지 두번쨰 파트이자 더 중요한 내용이 담긴 그레이엄의 결론 부분은 다음주에 연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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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o something well you have to like it. That idea is not exactly novel. We’ve got it down to four words: “Do what you love.” But it’s not enough just to tell people that. Doing what you love is complicated.

“어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을 좋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진부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늘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세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단지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사랑하는 일을 찾고, 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니까요.

The very idea is foreign to what most of us learn as kids. When I was a kid, it seemed as if work and fun were opposites by definition. Life had two states: some of the time adults were making you do things, and that was called work; the rest of the time you could do what you wanted, and that was called playing. Occasionally the things adults made you do were fun, just as, occasionally, playing wasn’t—for example, if you fell and hurt yourself. But except for these few anomalous cases, work was pretty much defined as not-fun.

이러한 아이디어는 우리가 아주 어려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일 때, ‘일’이라는 단어와 ‘재미’라는 단어는 이미 정의상 반댓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인생은 두가지로 나뉜 듯 보였습니다. 어른들이 시켜서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과, 자기시간이 남을 때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는 ‘놀이’라는 것으로요. 물론 가끔씩은 재미있는 ‘일’도 있었고 ‘놀이’가 재미없을 때도 있었지만 – 놀다가 다치거나 했을 때 – 그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이란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The world then was divided into two groups, grownups and kids. Grownups, like some kind of cursed race, had to work. Kids didn’t, but they did have to go to school, which was a dilute version of work meant to prepare us for the real thing. Much as we disliked school, the grownups all agreed that grownup work was worse, and that we had it easy.

세상은 두가지 분류의 사람들로 나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른들과, 아이들. 어른들은 마치 어떤 저주라도 씌워진 듯 매일같이 일해야 했고, 아이들은 일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그 일을 위한 준비과정이라서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인 학교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른들은 ‘일’을 힘들어했고, 학교 다닐때가 좋을 때라고 얘기했습니다.

I’m not saying we should let little kids do whatever they want. They may have to be made to work on certain things. But if we make kids work on dull stuff, it might be wise to tell them that tediousness is not the defining quality of work, and indeed that the reason they have to work on dull stuff now is so they can work on more interesting stuff later. [1]

물론, 아이들에게 대책없이 원하는대로 놀게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일’이란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또 가끔씩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어려운 일도 해야한다는 것을 좀더 잘 가르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중략)…

It was not till I was in college that the idea of work finally broke free from the idea of making a living. Then the important question became not how to make money, but what to work on. Ideally these coincided, but some spectacular boundary cases (like Einstein in the patent office) proved they weren’t identical.

대학에 들어가서야 나는 ‘일’이라는 것이 ‘입에 풀칠한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걸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나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이냐’가 되었습니다. 이상적으로 그 둘이 정확히 만난 지점을 찾으면 좋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수년간 특허청 직원으로 일했었듯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The definition of work was now to make some original contribution to the world, and in the process not to starve. But after the habit of so many years my idea of work still included a large component of pain. Work still seemed to require discipline, because only hard problems yielded grand results, and hard problems couldn’t literally be fun. Surely one had to force oneself to work on them.

이제 나에게 ‘일’이란 것의 정의는 ‘세상에 내가 어떤 기여를 하고 갈 것이냐’가 되었고, 그 와중에 굶어죽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 수년간의 습관 때문인지 ‘일’에 대한 나의 의견은 여전히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란 여전히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듯 했고, 어려운 일을 해내야만 위대한 성과를 낼수 있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재미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누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If you think something’s supposed to hurt, you’re less likely to notice if you’re doing it wrong. That about sums up my experience of graduate school.

누구든지 어떤 일이 ‘원래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임한다면, 자신이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못 알아챌 확률이 높습니다. 그게 내가 석사학위를 따며 배운 것입니다.

… (중략)…

How much are you supposed to like what you do? Unless you know that, you don’t know when to stop searching. And if, like most people, you underestimate it, you’ll tend to stop searching too early. You’ll end up doing something chosen for you by your parents, or the desire to make money, or prestige—or sheer inertia.

그렇다면 자신이 하는 일을 ‘얼마만큼’ 좋아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을 먼저 정확히 알지 않는 한, 당신은 평생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기 위한 여정을 멈출 수 없을겁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수많은 사람들처럼 스스로 과소평가 한다면, 꿈을 찾는걸 너무 일찍 멈춰버릴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마 당신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거나,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 또는 명예욕이나 최악의 경우 타성에 젖어 일하고 있을 겁니다.

Here’s an upper bound: Do what you love doesn’t mean, do what you would like to do most this second. Even Einstein probably had moments when he wanted to have a cup of coffee, but told himself he ought to finish what he was working on first.

우선 여기 한가지 팁이 있습니다. 상한선과 하한선을 정하세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뜻은, 지금 당장 하고싶은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 조차도 아마 일을 잠시 쉬고 커피를 한잔 하고 싶었지만, 참고선 먼저 하고 있던 일을 끝내야 했던 때가 있었을 겁니다.

It used to perplex me when I read about people who liked what they did so much that there was nothing they’d rather do. There didn’t seem to be any sort of work I liked that much. If I had a choice of (a) spending the next hour working on something or (b) be teleported to Rome and spend the next hour wandering about, was there any sort of work I’d prefer? Honestly, no.

나는 언제나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의 일이 너무 좋아서 다른일을 하는걸 상상조차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게는 도무지 그정도로 좋아하는 일은 없었거든요. 내게 선택권이 있어서 (a) 다음 한시간동안 어떤 일을 해야하거나 (b) 로마로 순간이동해서 여행을 할수만 있다면, 내가 로마 대신에 선택할 일이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NO 입니다.

But the fact is, almost anyone would rather, at any given moment, float about in the Carribbean, or have sex, or eat some delicious food, than work on hard problems. The rule about doing what you love assumes a certain length of time. It doesn’t mean, do what will make you happiest this second, but what will make you happiest over some longer period, like a week or a month.

사실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일하기보다는 캐리비언 해변에서 놀거나, 섹스를 하거나,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하고 싶겠지요. 따라서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의 정의에는 시간의 개념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줄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게 아니라, 일주일 또는 한달 또는 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한다고 생각했을 때 행복할만한 일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 (중략)…

To be happy I think you have to be doing something you not only enjoy, but admire. You have to be able to say, at the end, wow, that’s pretty cool. This doesn’t mean you have to make something. If you learn how to hang glide, or to speak a foreign language fluently, that will be enough to make you say, for a while at least, wow, that’s pretty cool. What there has to be is a test. I think the best test is one Gino Lee taught me: to try to do things that would make your friends say wow.

또한 행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스스로 돌아보고는 ‘와 내가 꽤 멋진걸 해냈네’ 하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꼭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행글라이더를 타는 방법을 배웠다거나, 외국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거나 한다면 스스로 ‘와 이거 꽤 멋진데?’ 생각하겠지요. 한가지 이것을 테스트 하는 더 좋은 방법은,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이 해놓은 일을 보고 ‘와 대단하다/멋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겁니다.

What you should not do, I think, is worry about the opinion of anyone beyond your friends. You shouldn’t worry about prestige. Prestige is the opinion of the rest of the world. When you can ask the opinions of people whose judgement you respect, what does it add to consider the opinions of people you don’t even know? [4]

그럼 당신이 해서는 안될 일은 뭘까요? 그것은 제 생각엔 당신의 친한 친구들 외의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는 것입니다. 명예에 대해서는 일절 욕심을 버리세요. 명예란 세상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의 의견 외에, 당신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하다는 겁니까?

This is easy advice to give. It’s hard to follow, especially when you’re young. [5] Prestige is like a powerful magnet that warps even your beliefs about what you enjoy. It causes you to work not on what you like, but what you’d like to like.

이건 말하기는 쉬운 조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따르기는 어렵지요. 특히 당신이 아직 젊은이일 경우 더 그렇습니다. 명예란 마치 강한 자석과도 같아서 당신이 스스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생각도 왜곡하지요. 명예는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 아닌 ‘좋아하면 멋져보일 것 같은 일’을 하게 만듭니다.

Prestige is just fossilized inspiration. If you do anything well enough, you’ll make it prestigious. Plenty of things we now consider prestigious were anything but at first. Jazz comes to mind—though almost any established art form would do. So just do what you like, and let prestige take care of itself.

당신이 어떤 일이던 뛰어나게 잘 하기만 한다면, 명예는 따라올 겁니다. 우리가 지금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대부분 처음에는 그랬지요. ‘재즈’라는 장르가 떠오르네요 (미국 사회에서 ‘재즈’는 원래 흑인 하층민들의 저급한 음악이었다). 그러니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명예는 따라올 겁니다.

The other big force leading people astray is money. Money by itself is not that dangerous.The danger is when money is combined with prestige, as in, say, corporate law, or medicine. A comparatively safe and prosperous career with some automatic baseline prestige is dangerously tempting to someone young, who hasn’t thought much about what they really like.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또 한가지 큰 이유는 ‘돈’입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돈이 위험해지는 것은 ‘명예’와 결합되었을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나 의사 같은 직종 말입니다. 비교적 안전하고 유망하면서도 돈도 많이 주는 그런 직종은, 아직 정말로 자신이 살면서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The test of whether people love what they do is whether they’d do it even if they weren’t paid for it—even if they had to work at another job to make a living. How many corporate lawyers would do their current work if they had to do it for free, in their spare time, and take day jobs as waiters to support themselves?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방법은, 그들이 지금과 같은 돈을 받지 않고도 그 일을 할지 보면 됩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기 위해 알바라도 할수 있는지 보는 겁니다. 변호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 받는 연봉을 못 받아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투잡을 뛰어야 한다면 그 똑같은 일을 할까요?

The advice of parents will tend to err on the side of money. It seems safe to say there are more undergrads who want to be novelists and whose parents want them to be doctors than who want to be doctors and whose parents want them to be novelists. The kids think their parents are “materialistic.” Not necessarily. All parents tend to be more conservative for their kids than they would for themselves, simply because, as parents, they share risks more than rewards. If your eight year old son decides to climb a tall tree, or your teenage daughter decides to date the local bad boy, you won’t get a share in the excitement, but if your son falls, or your daughter gets pregnant, you’ll have to deal with the consequences.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조언을 할 때 ‘돈’ 때문에 잘못된 조언을 하곤 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는 소설가가 되려는 아이와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케이스가, 의사가 되겠다는 아이와 소설가가 되라는 부모의 케이스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아이들은 이럴 경우 자신의 부모가 ‘물질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부모들이 물질적이라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대게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스스로에게 그랬던 것보다 훨씬 보수적인 선택을 강요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부모들 입장에선 아이들을 통한 성공보다는 위험요소가 더 많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8살짜리 아들이 높은 나무를 기어오르거나, 10대인 딸이 양아치와 사귀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누리는 흥분이나 재미는 함께 공유하지 못하지만, 아들이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딸이 덜컥 임신이라도 한다면 그 대가는 부모가 치르기 때문이지요.

출처: http://www.letssarm.com/doingwhatyo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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